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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사랑이 꽃피는 설레는 계절이다. 과거 신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았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의 유적지는 단순한 역사적 공간이 아닌 사랑과 야망, 결실과 좌절이 뒤섞이는 역사가 피어났던 공간이다. 봄이 오면 어느 곳의 꽃들은 다시 피어나고, 달빛 아래 속삭였던 연인들의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봄은 새롭고 향기로운 사랑을 가져오지만, 덧없는 이별을 만나게 하기도 한다. 과거 경주의 사람들은 사랑을 속삭이기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고민하기도 했다. 경주의 곳곳을 여행하다 보면, 장소가 주는 감동뿐만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선택을 했던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봄처럼 피었다가 사라진 사랑, 또는 그 결실.
긴긴 세월 동안 경주의 역사에 머물렀던 사랑 이야기를 알아보자.
▶ 깨달음과 사랑, 사랑과 깨달음… - 월정교
사랑이냐, 깨달음이냐. 원효대사는 본래 승려였지만,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계기로 파계를 감행하게 된다.
요석공주는 태종 무열왕의 딸로, 화랑 김흠운과 혼인했으나 남편을 잃고 요석궁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원효대사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원효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상심한 공주는 결국 상사병에 걸리고 만다. 이후 원효대사는 거리에서 ‘몰부가(沒斧歌)’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고, 이를 알아챈 태종 무열왕이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승려 신분이었던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만나려면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이에 한 관리가 문천교(현 월정교)를 지나던 원효를 일부러 다리 아래로 밀어 물에 빠뜨렸고,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나 열렬한 사랑을 나눴고, 그 사이에 신라 최고의 유학자 설총이 태어났다. 이후 원효대사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백성과 함께 생활하며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요석공주와 결국 이별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단순한 사실만 전할 뿐, 이후 함께 살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서술은 없다. 하지만 원효가 승려로 돌아가 더욱 깊은 불교적 수행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석공주와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야기의 끝이 어떻든, 원효대사는 사랑도 깨달음도, 심지어는 후손까지 모두 가진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4, 피은(避隱), 원효불기(元曉不羈)
▶ 광기 어린 지독한 사랑 - 분황사
사랑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마치 자해와 같은 사랑이 과거에도 있었다. 작자 미상의 고대 설화로 전해지는 ‘지귀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 시대, 지귀라는 한 남자가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에 반해 깊은 상사병에 걸려 몸이 점점 여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덕여왕이 절에서 불공을 드리던 중 지귀의 사연을 듣고 그를 불렀다. 여왕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었고, 이를 본 여왕은 자신의 금팔찌를 빼어 그의 가슴팍 위에 올려두고 떠났다. 잠에서 깨어 금팔찌를 본 지귀는 여왕을 기다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였고, 순간 몸에 불이 붙어 화귀(불귀신)로 변하고 말았다. 화귀가 된 지귀는 온 나라를 떠돌며 불길을 일으켰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문과 벽에 붙이게 한 후 이를 통해 화재를 막았다.
“지귀의 마음속 불길이/ 몸을 사르더니 변하여 불귀신이 되었네./
창해 밖으로 흘러가/ 만나지도, 친하지도 말지어다.”
화귀가 된 지귀는 끝내 선덕여왕의 관심을 다시 한번 받게 되었지만, 그것이 그가 바라던 사랑이었을까? 오직 자신의 감정만을 위한 사랑은 결국 불이 되어 스스로를 태우고, 주변마저 불태웠다. 그러나 그 끝에는 사랑도 이루어짐도 아닌 허망한 잔해만이 남았다. 한편, 선덕여왕이 분황사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 중 하나로, 신라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불교 의식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에 지귀 설화와 연관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 권4, 지귀 설화 원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불국사의 로미오와 줄리엣 - 석가탑
한국의 문화유산을 이야기할 때,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빼놓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는 단순한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슬프고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바로 불국사의 석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전설이다. 아사달은 신라의 요청을 받아 불국사의 석탑을 완성하기 위해 서라벌로 왔다. 그러나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서라벌로 향했다. 하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 남편을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성되면 그 모습이 연못에 비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탑은 물 위에 비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아사녀는 끝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만다. 뒤늦게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연못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아내를 잃고 난 뒤였다.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그는 끝내 불상을 조각하며 아내를 기렸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이유는 불교 문화의 특성과 관련이 깊을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돌 하나를 깎을 때마다 불공을 드릴 정도로 석탑을 쌓는 데 정성을 들였고, 신성한 작업 중에 부정이 탈 것을 염려해 아사달과 아사녀를 만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서로의 생명을 다할 만큼 애절한 사랑과 헌신이 서려 있는 불국사의 석가탑. 그 속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
어린이•청소년 국가유산청
▶ 야망을 위해 사랑을 이용한 팜므파탈 (야사) - 동궁과 월지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 진평왕이 일찍부터 후계자로 점찍어놨지만, 당시 신라는 여왕이 즉위한 전례가 없어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미실이었다. 미실은 MBC 드라마와 소설에서 조명받은 인물로, 신라 대학자 김대문이 신라시대 화랑도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세기>의 필사본에 그녀의 생애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미실이라는 인물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고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등장하며 해당 문헌은 진위 논란이 많기 때문에 실제라고 믿기보다 흥미 위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미실은 신라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3명의 왕과 인연을 맺으며 궁 안에서 가장 강력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미실이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40년에 걸쳐 빼어난 미모로 숱한 사내들을 녹여내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진평왕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그가 자신이 아닌 딸인 덕만공주(선덕여왕)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일부 야사에서는 미실이 진평왕을 유혹해 덕만공주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 덕만공주(선덕여왕)가 미실의 정치적 술수를 간파하고 조용히 세력을 키웠고 결국 아버지 진평왕의 후계를 이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삼국사기> 권4, 선덕여왕 본기
<화랑세기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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