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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나 제조업 등 모든 산업 활동에는 반드시 폐기물이 뒤따른다. 원자력을 이용하는 산업에서도 폐기물이 발생하는데 이를 방사성폐기물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방사성 물질 또는 그에 의하여 오염된 물질로써 폐기의 대상이 되는 물질이다. 방사성폐기물은 방사선을 방출하는 위험성 때문에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의료기기처럼 일시적인 사용이나 낮은 수준의 노출에는 큰 위험이 없지만, 방사선은 상황에 따라 인체에 영향을 주어 위험이 수반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각국은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 왔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원자력발전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한 관리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이에 따른 정책을 살펴보며,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역사적 흐름과 주요 쟁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번 봄호에서는 1980년대 당시의 상황과 방사성폐기물 관리 초기 정책 추진 과정을 함께 살펴보자.
고리원자력발전소1호기 전경(1978)
고리원자력발전소1호기 전경(1978)
원자력발전소 기공공사중(1981)
원자력발전소 기공공사중(1981)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 방사성폐기물 관리 대책 수립 동기와 시대 배경
1980년대에 원자력 발전소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기관의 수도 필연적으로 급증하였고, 그 결과 방사성폐기물 발생량도 증가하였다. 이는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가동 이후 원전이 증가하고, 산업 발전과 함께 방사성동위원소 이용 기관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폐기물 발생이 늘어나면서 안전 관리 문제도 함께 나타났다. 1983년 과학기술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가로 구성된 실무 작업반과 협력하여 종합적인 관리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60~70년대의 공해 반대 운동으로부터 반핵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공해로 인한 질병과 환경 문제가 언론을 통해 주목받으면서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환경 단체들의 원자력 발전소와 방사성폐기물에 관한 관심과 반대 활동은 점차 확대됐으며, 특히 핵과 환경 오염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 1980년대 추진 사업과 의결 내용
1984년 10월 13일 제211차 원자력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이 참여한 실무 작업반의 결과를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사성폐기물 국가 대책이 의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중·저준위 폐기물의 육지(추후 해양 처분도 검토) 처분
‣폐기물 관리 비용 발생자 부담
‣종합 관리를 위한 운영관리 기구를 정부 주도의 비영리기관으로 설치
‣사용후핵연료 관리 대책은 별도로 수립
1985년 6월 29일 제213차 원자력위원회에서는 ‘방사성폐기물 운영관리 기구 설치 방안’을 의결하여 한국 핵연료 주식회사가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을 전담·수행하도록 결정하였다.
1986년,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시급성을 인식한 정부는 1958년 제정, 1982년 전면 개정된 원자력법을 단기간 내에 재개정·공포하였다. 개정 법령은 폐기물 수행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사업의 주체를 한국 핵연료 주식회사에서 한국에너지 연구소(1989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로 명칭 변경, 현 한국원자력연구원)로 전환하며, 원자력위원회의 정책 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국무총리 소속으로 격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1988년 7월 27일 제220차 원자력위원회에서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위해 1995년 말까지 지중 매몰식 영구처분 시설을 건설하고, 사용후핵연료는 국가정책 결정 시까지 중간 저장 관리하며, 이를 위한 중간 저장시설을 1997년 말까지 원전 부지 외부에 집약 식으로 구축하자는 기본 방침을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에너지연구소는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시설 및 사용후핵연료 중간 저장시설 건설을 위한 부지 확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 부지 확보 추진
1987년 6.29 민주화운동 이후 국민의 권리 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생활의 질을 중시하게 되었고,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강해졌다. 특히,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 확보를 추진할 당시 기존 국책사업의 방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주민들은 정당한 보상 없이 시설 확장을 수용할 수 없었고, 환경단체들은 부지 선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88년 이전에는 원자력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했으나,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민주화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동조는 크게 줄어들었고, 정부의 정보 통제 약화와 언론 보도의 자유 확대는 관련 정보를 대중에게 폭넓게 제공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 정책 추진의 문제점
당시 원자력 사업 추진 체계는 사업 분야(동력자원부, 한전 및 관련 기업)와 연구·규제 분야(과학기술처 산하 한국 에너지연구소)로 나뉘어 있었다. 동력자원부와 과학기술처는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의 소관 부처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였다. 연구는 과학기술처 산하 한국 에너지연구소가, 사업은 동력자원부 산하 전담 기구가 맡는 방향으로 일단 합의되었으나, 동력자원부가 인허가권까지 요구하면서 양 부처 간 대립이 심화되었다. 1989년 3월, 국회는 동력자원부에 발전사업과 안전관리 업무를 함께 수행할 것을 촉구했으나, 이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또한, 1989년 정부 조직 개편 시 동력자원부는 과학기술처로부터 원전 관련 인허가를 이관받으려 했으나, 과학기술처는 이를 원전 안전관리 관할권 상실로 이어질 우려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부처 간 갈등과 협조 체계의 미흡은 방사성폐기물 관리 사업 추진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한국의 초반 방사성폐기물 관리 대책 추진은 원자력 발전 확대에 따른 폐기물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초기 시도였으나, 부처 간 권한 다툼과 협조 부족, 그리고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인해 여러 갈등을 겪었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행정적 혼선과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면서 사업의 진행이 지연되었고,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복잡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1980~90년대는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의 과도기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사회적 공론화와 협의를 거쳐 민주적인 합의와 이행이 가능해졌으나 이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서는 1990년대의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의 변화와 발전을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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